■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
오랜만에 오윤(1946~86)의 판화를 다시 보았다(아라아트, 9·19~10·16). 그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칼로 새긴 그림들은 유혼처럼 떠돌아 어디선가 이렇게 마주하고 있다. 나무의 표면에 칼질을 해서 또렷하게 새긴 이미지는 군더더기 없는 형상의 요체와 흑백의 단호한 대비 속에서 빛난다. 당대 현실에 대한 뜨거운 감정과 분노, 애정 등이 두루 다 녹아서 흐른다. 그 이미지는 기존 미술어법과 판이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장식, 요령, 꼼수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이 절실하게 표현하고 싶은 것을 진정으로 형상화할 뿐이다.
그의 모든 판화가 다 좋지만 유독 이 ‘칼노래’는 그 단호함에서 인상적이다. 칼춤을 추는 남자의 눈매가 오윤 그대로다. ‘칼노래’는 최제우가 19세기 한국 땅에 닥친 내외적 상황을 한칼에 자르는 것을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모든 삿된 것들을 한칼로 베는 자이다.
그런 존재가 바로 예술가라고 보았을까? 그는 우리 역사 속에서 민중의 삶과 애환, 그리고 그것을 풀어내는 생존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른바 살(煞)의 정체를 풀어 신명을 획득한 우리 조상들의 생존방식을 흥미롭게 본 것이다. 그 살풀이로서의 그림, 살을 푸는 행위자로서의 예술가상은 그래서 나온다. 그는 우리가 잊고 지냈던, 근대화 속에서 망실되어 버린 ‘신명과 주술이 지배하는 세계’를 진정 추구했던 이다.
알다시피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망실된 전통 이미지가 지닌 주술성과 영성성, 살풀이의 힘을 회복시킨 이는 공교롭게도 거의 같은 시간대에 대표작을 내놓고 죽어간 오윤과 박생광이다. 나로서는 그런 오윤의 여정이 압축되어 나온 것이 1984년에서 죽기 직전인 1986년 7월5일 사이에 나온 ‘원귀도’ ‘칼노래’ 같은 작품이라고 본다.
오윤은 억울하게 죽은 숱한 혼령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아픈 상처와 한을 보듬는 살풀이로서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이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진정으로 민중의 삶과 아픔을 이해하고자 한 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무당이라고 보았다. 그는 “예술가면 무당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당만큼 울려주고 감동시켜 보라”고 말한다.
오윤의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내내 그의 육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예술이 살아남는 길은 하나밖에 없어요. 정말 진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올바른 역사인식이나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 현실에서 그의 그림이 여전히 감동적인 이유이다.
–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