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클래식, 민속음악 등을 아우르며 음악의 격을 높인 한 레이블에 관한 모든 것이 서울을 찾는다. 음악을 주제로 하는 이 새롭고 특별한 전시에서 소리의 장인이 추구하는, 침묵 다음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느끼시라.
기타리스트 팻 매스니와 피아니스트 키스 자렛이 지금과 같은 이름값을 구축하기 훨씬 전, 음반 녹음을 위해 둥지를 텄던 레이블이 있다. 1969년에 설립된 ECM이다. 미국에 ‘블루 노트’가 있다면, 독일엔 ECM이 있다. 블루 노트가 재즈와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어떤 재즈와 동의어로 인식되며 ‘명품’의 전당에 오르는 동안, ECM도 재즈와 클래식, 민속음악, 현대음악을 아우르며 음악의 격을 높였다. ‘뮤직도르프’라는 레이블을 세운 음악감독 이병우가 ‘한국의 ECM를 표방하며 레이블을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작곡가 유희열이 음악 초년생 시절 만난 ECM의 음반 한 장으로 ‘모든 게 뒤바뀌어버렸다’고 회상하며, 작사가 박창학은 ‘하나의 레이블이 이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라고 칭송하는 곳. 음악인과 마니아들에겐 성스럽기까지 한 이름이지만 대중적으로는 다소 낯선 ECM에 관한 모든 것이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 찾아온다.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8월 31일부터 두 달여간 열리는 <ECM전: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서다.
눈치챘겠지만, 음악을 아이팟으로 소비하는 시대에 레이블의 이름만으로 ‘믿고 듣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ECM이 지닌 고전성과 소리에 대한 고집을 짐작케 한다. 언젠가 정말로 세상이 뒤바뀌고 ‘설국열차’가 지구를 도는 시대가 온다면, 이런 레이블 이름은 희귀한 유산처럼 회자될 거란 뜻이다. 무엇이 그 이름을 그리 대단하게 만들었을까? 1970년대에 접어든 영미권에서 록과 팝이 인기를 얻으며 기존의 재즈 위상이 약해질 무렵, 유럽의 ECM은 당시 ‘뉴 웨이브’로 불렸던 팻 매스니, 키스 자렛, 칙 코리아 같은 아티스트의 감성을 재즈와 접목했다. 내한 공연을 하면 여전히 티켓 파워가 있는 팻 매스니나 키스 자렛 트리오의 음악은 스윙감이 있는 찰진 재즈라기보다 서정적이고 운치 있는 분위기다. ECM은 재즈에 대한 새로운 기류를 만들며 재즈나 클래식의 저변을 넓혀갔고, 여기에 각 나라의 민속음악을 끌어왔다. 중세 성가와 색소폰이 만나거나, 색소폰과 ‘우드(Oud)’라고 불리는 아랍 전통 기타가 만나는 식이다. 세상의 불순물이 섞이지 않는 성가대의 소리와 아주 세속적인 색소폰 소리의 만남. 이를 테면 이렇게 새로운 소리는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 묘하게 어우러지는 신선한 음악으로 다가왔다. 20년전, 한국의 김덕수 사물놀이패 역시 재즈그룹과 협연하며 ECM을 통해 음반을 낸 적이 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거의 모든 것이었듯, ECM에도 지금까지 수십년을 이끌어 온 설립자가 있다. ECM 대표이자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는 음악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상업성은 뒷전으로 두고 오직 ‘최상의 소리’를 보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각자 특성이 있지만, ECM을 통해 나오는 음반의 사운드는 광활한 대지에 섰을 때 느낄 법한 공간감이 느껴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만프레드 아이허는 클래식 무대 경험을 살려 기계의 왜곡이 아닌 악기의 원음을 살리는 것에 집중했고, 고요함 속의 울림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실제로 교회에서 음악 녹음을 진행하기도 했다.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ECM의 모토이기도 하다. ECM에서 발매되는 트랙들은 대개 10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않다가 청자의 귀에 스며들듯 음악을 흘려 보내기 시작한다(이 녹음 과정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사운즈 앤 사일런스>가 재작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음악의 질만 고집스럽게 따지는 레이블이었다면 수십 년 동안 충성스런 마니아들을 거느리진 못했을 것이다. 음반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큰 요인 중 하나는 바로 앨범 커버. 유럽권 작가들의 사진과 회화 등을 이용한 ECM 앨범 커버들을 모아 놓으면, 단순하고 추상적인 현대 미술 작품을 진열한 갤러리 같다. ECM에서 나온 앨범 커버들의 아트워크를 모아 설명해놓은 디자인북들이 있을 정도다. 이 역시 ECM 설립자이자 현 대표인 만프레드 아이허의 철저한 디렉팅 아래 만들어지는데, 그의 눈에 들어 앨범 커버 이미지에 쓰일 작품 사이즈는 그가 늘 들고 다니는 서류 가방 사이즈보다 크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여름이면 콜라보레이션한 프린트 티셔츠를 내놓는 유니클로는 ‘ECM 레코드 프린트 티셔츠’를 판매하기도 했다.
<ECM전: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에선 청음 가능한 음악, 앨범 커버에 쓰인 사진과 회화, 영상 등이 모두 모인다. 음악을 주제로 하는 전시란 것이 언뜻 상상이 가지 않지만, 전시장에 진열될 물질적인 것들 외에도 만프레드 아이허(한 레이블을 고집스럽게 이끌어 온 그의 ‘포스’는 어떨까?)와 함께 내한하는 기타리스트 랄프 타우너와 비올리스트 킴 카쉬카시안의 마스터 클래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ECM 특별영화제, 9월 7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ECM 뮤직 페스티벌까지 있으니 그 규모가 제법 크다. 뮤직 페스티벌엔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이 함께한다. 정명훈이 곧 생애 첫 번째 피아노 솔로 앨범을 ECM을 통해 녹음할 예정이고, 그의 둘째 아들이 ECM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으며, 라틴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적 있는 보컬리스트 신예원(정명훈의 며느리이기도 하다)의 앨범이 올해 중 ECM에서 발매된다는 건 소소한 뒷이야기다.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처음의 정신을 꼭 붙들고 지금 이 시대의 음악을 갈고닦는 이름. 소리의 장인으로 남아 있는 레이블이 있는 한, 음악으로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은 보존될 것이다.
* 더 자세한 내용은 <VOGUE> 2013년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에디터 _ 피처 에디터 / 권은경(KWON, EUN KYOUNG)
PHOTO _ Courtesy of ECM
출처 _ Vogue webs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