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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창으로 파낸 우리 산하

정비파, 아라아트센터서 목판화전
6m ‘백두대간’서 ‘한국근대사’까지
진경산수화같은 회화적 미감 물씬

2015-07-28 10;46;20
판화가 정비파 씨의 ‘백두대간’.

칼칼한 선으로 주름 잡힌 산줄기들이 첩첩이 파도처럼 뻗어오른다. 칼창으로 파내고 찍은 거대한 목판화폭 위에서 이 땅의 뼛기운 송연한 백두대간 자락이 약동하는 장관이 펼쳐지고 있다. 고난의 역사에 멍들고 문명의 파괴에 찢겨나가도, 대간의 큰 줄기는 묵묵히 한반도의 등짝을 이루며 북으로 달려간다. 멀리 운무에 떠 있는 산줄기 자취들이 백두대간의 힘찬 기운을 더욱 소슬하게 드러낸다.

판화가 정비파(59)씨가 파내고 찍은 목판화 대작 ‘백두대간’(도판)은 역사 깃든 우리 국토의 초상이다. 길이 6m짜리 이 대작을 위해 작가는 경주 불국토 남산 기슭 조양동에 흙집을 짓고 10년간 칼로 나무를 파고 찍는 작업에 몰두했다. 틈나는 대로 나라 안 곳곳을 돌며 벌여온 국토기행의 결과물을 쉼없이 사생하며 풀어냈다. 18세기 진경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이 발견했던 금강산 암봉의 서릿발 같은 기운을 백두대간과 동해바다의 해안에서 발견해 목판에 옮겼다. 15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가 광복 70돌 특별기획전으로 마련한 그의 목판화전 ‘국토’는 이런 노고의 결실로 탄생한 전례 없는 대작들의 연속이다. 22점의 출품작들은 백두대간 연작을 비롯한 가로 6m짜리 작품이 넉점이고, 제일 작은 소품도 가로 2m가 넘는다. 무상한 역사가 깃든 국토의 진경을 오랜 숙고 끝에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 판화사에 일찍이 없었던 기념비적인 수작들이라 할 만하다.

한지 화폭에 유성잉크로 찍어낸 그의 다색목판화들은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처럼 사실적인 이 땅 산하의 경치를 새롭게 재해석한 회화적 미감이 물씬하다. 강퍅한 암봉 위 허공에서 매들의 싸움판이 벌어진 풍경으로 질곡의 한반도 역사를 은유한 ‘한국근대사’ 연작과, 새떼들의 군무로 저녁놀이 출렁거렸던 낙동강변의 옛적과 갖은 개발로 새떼들의 자취가 거의 사라진 현재를 대비시킨 낙동강 연작 등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다. ‘판화 특유의 판깎기를 통해 최대한 실경을 덜어내고 남은 응축된 풍경’(평론가 김종길)이면서, 기법적으로는 번들거리기 쉬운 유성판화의 맹점을 피한 것이 참신하다. 그냥 먹으로 찍은 수성판화처럼 더욱 담백한 분위기로 장대한 국토의 풍수와 기세를 포착하려는 각고의 기법적 노력까지 더해졌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정 작가는 대학에서 양화를 전공했으나 1980년대 초부터 목판화 작업을 시작해 80년대 참여미술 진영에서 민중판화가로 활동했다. 90년대 이후 조국강산의 기운생동한 현장을 좇는 국토기행과 석굴암 등 불교미술 쪽으로 작업을 전환하면서 선이 굵은 진경목판화 작업의 새 경지를 여는 데 진력해왔다. 작가는 “내가 사는 이 땅 국토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감동을 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왔다”며 “여전히 출판물 정도로 인식되는 목판 그림의 다양한 회화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아라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