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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예술기행] 쿠바 상자속의 여인, 그 기막힌 사연

■ 상자 속에 숨어 태평양 건널때도… 에니껭 노동자로 고된 삶 살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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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수도 아바나엔 7∼8월 바캉스 시즌이 되면 30여개 살사 오케스트라가 전국에서 몰려든다. 아바나의 아이콘인 방파제 말라콘을 비롯해 길거리 곳곳에서 연주를 펼치기 위해서다. 춤을 즐기는 젊은이들도 덩달아 모여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분위기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정부가 오케스트라 지원을 중단한 것이 가장 큰 이유지만 ‘외화벌이 외국공연’에 내몰리는 것도 한 요인이다. 해질녘 말라콘과 도시 골목길마다 넘쳐 흘렀던 쿠바풍 재즈와 강렬한 비트의 흥겨움은 옛말이 됐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듯한 살아 있는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궁여지책으로 외국 관광객들은 입장료를 내는 레스토랑에서 살사 공연을 보고 젊은이들은 입장료가 저렴한 음악의 집 ‘카사 데 뮤지카’로 몰려 허기를 채우고 있다.

늦은 밤 길거리에 나서니 화장기 짙은 여인들이 호객행위를 한다. 불과 2년 전 아바나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방금 전 들른 레스토랑에서 주문하지도 않은 메뉴가 계산서에 더해진 모습과 중첩됐다. 성매매와 바가지, 아바나는 이제 더는 예전의 아바나가 아니었다. 체 게바라의 혁명의 흔적은 빛바랜 사진 속에서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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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3세 작가 알리시아와 모친, 그리고 한글을 배우고 있다는 그의 외아들.(오른쪽부터)

 

쿠바를 방문하는 이들은 쿠바 사람들의 평온함에 놀라게 된다. 어떻게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도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무기력함의 평안이라고. 북한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민박에 여장을 풀고 아바나 시내에 살고 있는 한인3세 화가 집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던 알리시아 데 라 캄파 박(45)이다. 거동이 불편한 작가의 노부모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문앞 소파에 앉아 무심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할머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할머니는 얼굴도 보지 않고 부모가 정해준 대로 한 남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술주정뱅이에 놀음꾼이었다. 돈이 떨어지자 할머니를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이 사실을 알아차린 할머니는 도망쳤다. 항구에 도착한 할머니를 도와준 것이 할아버지였다. 큰 상자(일종의 짐짝)에 숨겨줬다.

서울이 고향인 할아버지(박두현)와 서울 근교 출신으로 추정되는 할머니(이순이)는 멕시코 에니껭농장에서 일하다가 쿠바의 마탄사(Matanza) 지역으로 이주했다. 1930년 쿠바에 도착했을 당시 외국인 등록 서류에 보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라 쿠바 정부가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영주권은 아니고 임시 거주권이었다. 당장 세금을 낼 수 없는 형편이니 배려 차원에서다. 상황이 좋아지면 당연히 세금을 내야 된다고 명기하고 있다. 1달러54세트의 비용을 지불하고 임시거주권을 받아 새 생활을 시작했다. 서류상 사인은 1935년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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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시아 할머니에게 1947년 발급된 건강진단서.
쿠바 영주권 발급을 위한 기초자료로 사용됐다.

 

알리시아는 할아버지가 사용했던 낡은 수첩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수첩엔 독립을 염원하는 ‘조선 학생의 노래’, ‘조선의 노래’를 비롯해 ‘부모은덕가’ ‘한반도가’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스페인계 쿠바인과 결혼한 알리시아의 어머니 박영희(86)씨는 ‘대한’에서 왔냐고 어눌한 한국말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이내 스페인어로 말을 이어갔다.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아버지가 한국말을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일본 지배가 싫어 배 타고 멕시코로 건너갔다고 했다. 돈을 벌어 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정부에서 일했던 분이다. 쿠바는 멕시코보다 좋을 것 같아 이주했다.

박 여사는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몹시 불쌍한 분이라고 거듭 부연했다. 남편이라는 사람이 중국인에게 팔아넘겼다. 그때 한국인들이 에니껭 이민이라 하여 멕시코로 이주하는 배가 있었는데, 그때 도망가던 엄마를 상자 속에 집어넣어 숨겨준 것이 아버지였다. 그래서 ‘상자 속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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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일을 해야 했던 어머니였다. 무더위 속 에니껭 작업은 살인적 노동이었다. 결혼식조차 할 수 없었다. 단지 함께 살면서 6명의 자녀들을 낳았다. 지금은 박 여사만 생존해 있다. 박 여사는 그래도 한글을 익혔다. 한글을 반드시 익히고 스페인어를 배워도 된다는 어머니의 고집 때문이다. 한글을 익히기까지는 초등학교를 보내주지 않아 11세에 겨우 쿠바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박 여사는 “한국은 아직도 남자 얼굴도 모르고 결혼하는가요”하고 물었다. 그는 엄마의 이야기는 너무 슬프다고 했다. 얼마나 기가 막힌지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부모 생존시에는 한국 친척들과는 연락이 됐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고통을 받았던 한국을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이 이해가 안 갔다. 지금은 그도 한국에 가 보고 싶다. 그 이유는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나라이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1986년 아바나의 산알레한드로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10년간 교수로 회화와 드로잉을 가르쳤다. 지금은 교수직을 내놓고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촉망받는 작가다. 어머니 쪽 피가 강해 동양적 얼굴을 가지고 있어, 초중등 시절엔 ‘너는 중국사람이냐”고 물어 오는 것이 일상사였다.

그의 그림엔 나비가 많이 등장한다. 현실의 무게감을 덜기 위해 많이 그렸다. 인물들은 인간의 내면 세계를 부채처럼 펼쳐 보여준다. 그의 남편도 화가다, 부부작가라 삶의 무게가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한동안 유방암과 사투를 벌어야 했다.

“이런 과정들이 작업에 성숙을 가져오는 것 같아요. 작가들에게도 돈은 중요해요. 그래서 상업적 성공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그림을 요구할 때(자기 복제) 저는 그렇게 그리기 싫어요. 저의 삶과 연결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지금 비록 돈에 대해 절대적 필요성은 느끼지만 저만의 길은 계속 가렵니다.”

그는 요즘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 “어린 시절 엄마가 일 때문에 너무 늦게 귀가해 한국말을 배울 수가 없었어요. 왜 한국말을 배워야 하는지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요. 가르쳐 주는 데도 없었어요.”

그는 대학을 졸업한 자신의 외아들이 지금 한국어 공부에 열중한다고 했다. “한국사람이 주고 간 사전을 갖고 한국 말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단어 수준 정도에서 익히고 있지요. 어느 한인 집에서 토요일마다 한글을 가르쳐 주었지만 한계가 있지요. 교민사회가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어요. 근래엔 인터넷에 나오는 백과사전으로 익히고 있습니다.”

그는 전시회를 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인 3세로서 그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존재일까. “한국을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게 있어 한국은 단지 하나의 환상에 불과했지요. 어머니를 통해 희미하게 알고 있는 안갯속 나라 정도 였지요.”

그는 가끔 한국에 관한 영화나 뉴스를 접하게 된다. 어머니가 말해주는 한국과는 매우 달랐다. 특히 한국을 방문하면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충격이 컸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너무 급한 일정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이제 한국은 나의 가장 큰 부분이기 때문에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요.” 그는 이제 한국의 그의 미래가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이 너무 좋았다. 한국 사람들도 좋았다. 그래서 그의 아들이 꼭 한국을 가서 한국을 제대로 공부하기를 바란다. 그의 꿈이기도 하다. 아들은 산알레한드로 미술대학에서 판화와 드로잉을 공부하고 최근 졸업했다. 어렸을 때 아들에게 판화를 가르쳤는데 결국 전공이 돼버렸다.

알리시아는 아크릴로 바탕작업을 하고 목탄으로 그림을 그린다. 먼저 작품을 그리기 전에 구상을 하고, 일단 작품 타이틀을 생각한다. 문학적인 요소를 중요시 하는 것이 그의 작업 방식이다. 밑작업은 많이 안 하고 캔바스 앞에 앉아 그리고 싶은 것을 직접 그리기 시작한다.

인물에 집중한 작업들이 많다. 가톨릭적인 요소인 성모 마리아와 아프리카 부두교가 그의 화폭에서는 하나가 된다. 쿠바의 문화적 토양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 테마는 ‘여성’이다. 그렇다고 그가 페미니스트라는 얘기는 아니다. 여러 가지 좋아하는 테마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 ‘여성’일 뿐이다. “제가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시각에서 많은 이야기를 펼쳐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는 여성으로서 꿈과 주변 이야기 등을 화폭에 풀어낼 뿐이다.

쿠바는 자국민 화폐인 쿠바페소와 외국 관광객만이 쓸 수 있는 세유세(CUC)가 있다. 맥주 등 일부 품목은 종류에 따라 세유세로만 살 수 있다. 이중화폐 정책이다. 아침에 거리에 나가보면 보급소에서 빵과 고기 등을 줄을 서서 받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배급제가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 것이다. 세유세로 맥주 몇 병을 사 민박집 주인에게 건네주자 큰 손을 치켜들며 좋아한다. 쿠바인들은 바가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관광객들로부터 세유세를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다. 청순한 눈망울들이 돈맛에 스러져 가는 모습이 안스럽다.

아바나=편완식 선임기자 〈공동취재: 안진옥 중남미 미술전문가, 권순익 화가, 김영재 사진작가〉

– 세계일보, 편완식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