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 건축 사진가 박영채]
‘눈 온다’ 예보에 목숨 걸고 달려 발자국 없는 하얀 소쇄원 찍고 밤 새워 운무 가득한 금산 담아…
건축물 촬영할 땐 빛이 중요, 해제 일의 대부분은 기다림이죠
이건 사진 촬영이라기보단 낚시에 가깝다. 건축 사진가 박영채(51·사진)는 “내 일의 대부분은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건축물 앞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박영채는 그저 버틴다. 그 건축물 특유의 매혹을 오롯이 보여줄 한 조각 빛이 하늘에서 떨어지기까지. “마치 낚시꾼이 숨죽이고 있다가 물고기를 휙 낚아채듯이요. 그 건물을 찍기에 적합한 최적의 빛은 딱 하나니까요(웃음).”박영채는 국내 건축 사진가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표 사진가다. 김인철·정재헌·황두진·노은주·임형남을 비롯한 유명 건축가가 설계 도면이 나오자마자 찾는 사진가이기도 하다. 9일 서울 광화문에서 박영채를 만났다. 그는 10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견지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사진전 ‘건축도시기행’을 준비 중이다. 13명의 국내 건축 사진가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다. 그는 “원래 건축 사진가가 되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왔다”며 빙그레 웃었다.인연의 시작은 뜻밖에도 부도(不渡)다. 신구대학 사진과를 졸업하고 취직한 잡지사가 석 달 만에 폐간됐다. 졸지에 백수가 된 박씨를 부른 건 함께 일했던 편집장 선배 이우재씨. 그는 “‘건축과 환경(지금의 ‘C3’)’이란 잡지사에서 일해보라”고 했다.
엉겁결에 찍기 시작한 건축 사진. 그전까지 찍던 사진과 건축 사진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박씨는 “그전까지 찍었던 사진이 감성을 담아내는 작업이었다면, 건축 사진은 건축물의 본질을 담아내는 이성적이고도 분석적인 작업이었다”고 했다. 건축잡지에서 1년 반 일하다 그만두고 갈 곳 없는 그를 위해 건축가 김인철(아르키움 대표)이 사무실 책상 하나를 내줬다. 건축 모형과 건축 사진 찍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건축 도면을 펼쳐놓고 공부했고, 계절별·시간대별 빛의 표정을 연구하고 익혔다.
1993년부터는 전남 담양 소쇄원의 사계절 풍광을 카메라에 담는 데 골몰했다. 기상청 예보를 끼고 살았다. ‘눈이 온다’ 예보가 뜨면 새벽부터 시속 100㎞로 차를 몰아 내달렸다. 목숨을 건 미친 주행. 사람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눈 속 소쇄원을 찍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확률이 얼마 안 돼요. 눈이 밤새 사락사락 담뿍 내렸다가, 아침엔 그쳐야 해요. 새벽 무렵 파란 하늘에 해가 떠야 하고요. 그때를 맞추려면 죽어도 내려가야죠.” 2000년엔 ‘소쇄원의 아침’이란 이름으로 전시하고 사진집을 냈다.
작은 집 열풍을 불러온 ‘금산주택'(2011년 5월·임형남·노은주) 사진을 찍을 땐 아예 이슬을 맞으며 밤을 새웠다. “금산에 인삼 축제가 열렸는지 여관방이 하나도 없었어요. 금산주택 앞에 자동차 히터 틀어놓고 밤을 새웠는데, 새벽 무렵 집 주변에 운무(雲霧)가 가득하더군요. 덕분에 사진을 낚았죠.”
지금도 박영채는 셔터를 함부로 누르지 않는다. 열 번 찍는 대신 열 번 생각하고, 한 번 누르는 쪽이다. “건물의 소재, 면과 곡선, 기울기를 따져가며 최적의 빛을 기다립니다. 원했던 빛이 찾아오면, 그때, 누르죠.”
박영채는 “건축 사진은 그래서 결국 과학이고, 건축가의 생각을 담는다는 점에서 철학”이라고 했다. “게으름은 피울 수 없죠. 건축물은 항상 새롭고, 현장은 자주 예상을 빗나가니까.”
– 조선일보 / 송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