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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 초청전] 한여름, 스님이 법당에 불을 지핀 이유는?

■ [인터뷰] 다산 정약용 선생 탄신 250주년 기념 전시회 여는 김성태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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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방지기’ 김성태 서예가 ⓒ 유혜준

지난 여름, 유난히 장마가 길었다. 눅눅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습기의 농도는 깊고 진했다. 그래서 제습기가 인기가 높았고 가장 많이 팔렸다고 하던가. 이런 여름을 아주 힘겹게 난 이가 있다. 오는 4일,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여는 장천 김성태 서예가다.현재 KBS 아트비전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김 작가는 <오마이뉴스> 블로그 ‘나의 캘리그라피 이야기’를 운영하는 인기 블로거이기도 하다. 김 작가는 지난 2008년 처음 개인전을 열었고, 지난 2011년에는 법정스님 입적 1주기에 ‘법정스님의 죽비소리’ 특별전을 열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아! 여유당!’이라는 제목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 탄신 250주년과 정본 여유당전서 발간 기념’을 겸해 열린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문헌에서 글을 발췌해 쓰고 한글로 해석을 달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다산학술문화재단이 주관한다.

지난 여름 49일 동안 이어진 장마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김 작가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화선지에 먹을 묻힌 붓으로 글씨를 써야하는데, 화선지가 습기를 잔뜩 머금어 붓을 대기만 하면 먹물이 확 번지기 때문이다. 뽀송뽀송 하게 마른 화선지 위에 글씨를 써야 하는 김 작가 입장에서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던 것.

서울시 영등포구에 있는 작업실 ‘무명각’에서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고 화선지가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붓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김 작가. 그 뿐이 아니다. 가로 8.4m 세로 2.4m의 대작 ‘근검(勤儉)을 쓸 때는 법당 안에 군불을 지펴서 눅눅해진 화선지를 말려야 했다.

‘근검’은 대작이라 글씨를 쓸 장소를 물색해야 했고, 양평 정곡사 법당에서 쓸 수 있었다. 정곡 스님이 김 작가가 오기 전에 미리 법당에 군불을 지폈다. 김 작가는 스님의 배려에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기억을 돌이켰다.

지난 2일 오후, 전시회를 이틀 앞둔 김성태 서예가를 작가의 작업실 ‘무명각’에서 만났다. 다음은 김 작가와 한 인터뷰 내용이다.

– 올 여름 유난히 덥고 장마가 길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너무 덥고 후텁지근해서 고생했다. 장마가 길어 습기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작업실에 에어컨을 틀어놓고 습기를 머금은 종이를 말린 다음에 글씨를 써야 했다. 종이 때문에 에어컨을 세게 틀 수밖에 없어 냉방병에 걸려 고생했다. 종이가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붓을 대면 먹이 그대로 번져 버린다. 전시회 날짜는 다가오고, 글씨는 써야 하고… 힘들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을 주제로 택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작년이 다산 선생 탄신 250주년이다. 올해 전시회는 그 연장선상에서 열린다. 작년에 다산학술재단에서 행사를 하면서 재능기부 형식으로 제호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게 인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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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실 ‘무명각’에서 부채에 다산 선생의 글을 쓰고 있는 김성태 서예가

김 작가는 “지난 2011년에는 법정 스님을, 이번에는 다산 선생을 주제로 삼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큰 사람들을 주제로 삼아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그분들을 공부하다보면 스스로 도량이 넓어지고 그릇이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배우고 닮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 이번 전시회에 전시하는 작품은 전부 몇 점인가? “32점이다. 작은 것부터 대작까지 다 포함된다.”

– 32점의 작품을 쓰기 위해 몇 장의 화선지를 썼는지? “화선지 전지를 기준으로 700~800장 정도를 쓴 것 같다.”

화선지 전지는 140cm X 70cm의 크기라고 김 작가는 설명을 덧붙였다. 김 작가는 다산 선생 전집을 보면서 어떤 글을 써야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의 시대에 맞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는 글을 찾는 작업이 전시회 준비단계였다는 것이 김 작가의 설명이다.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지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글씨를 쓰다가 맥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쓸 글을 찾아 놓는다는 것이다. 다산초당에 다녀온 것도 다산 선생의 숨결과 체취를 고스란히 글씨 안에 담고자 하는 열망에서였다고 한다. 김 작가는 4개월여에 걸친 준비 작업을 마친 뒤 5월부터 본격적으로 글씨를 쓰는 작업에 들어갔다.

–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은 무엇인가? “32점 전부 내게는 소중하다. 하지만 가장 힘들게 작업한 작품이 기억에 오래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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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작품 ⓒ 김성태

김 작가는 가로 8.4m 세로 2.4m의 대작 ‘근검(勤儉)과 다산시문집 13권에 실린 ‘재기(守吾齋記)를 꼽았다. 수오재기는 길이가 2.1m나 되는 작품으로 한 번도 안 쉬고 쓰면 2시간이 걸린다. 내용이 길어 쓰다보면 중간에 한 글자씩 틀려 다시 쓰기를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2주일이나 걸렸다니, 그 어려움이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근검’은 다산 선생이 유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오늘 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하면서 의미가 깊다고 생각했다.”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부적같이 여길만한 두 글자가 있어서 너희들에 주겠으니 소홀히 여기지 말거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가지고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 – ‘근검(勤儉)’ 풀이 내용

다산의 절절한 자식 사랑이 담긴 글귀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이 담긴 작품의 크기는 가로 8.4m 세로 2.4m로 가로 1.4m, 세로 2.4m의 화선지 6장을 이어붙였다고 한다. 그 작업은 양평 통방산 정곡사에서 했다. 정곡스님이 김 작가가 뽀송뽀송한 화선지에 글을 쓸 수 있게 한여름인데도 법당에 군불을 지폈다.

“두 번째로 쓸 때 다행스럽게 터져서 완성할 수 있었다. 서단에서 이렇게 큰 작품을 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표구를 할 때 어려웠다. 인사동에서 가장 큰 표구사에서 표구를 하는데 작품이 너무 커서 못하겠다고 해 결국은 작품을 절반으로 자른 뒤에 다시 이어 붙이는 작업을 해야 했다.”

– 서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6살 때부터 서예를 했다. 아버지가 경남 거창에서 처음으로 서예학원을 여신 분이다. 자연스럽게 묵향을 맡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첫 번째 수강생이자 제자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한 길만 걸어왔다.”

김 작가는 원광대 서예과 1기 졸업생이다. 그에게 길은 오로지 ‘글씨’로만 이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KBS 아트비전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는 건가? “프로그램의 타이틀(제목)을 쓰고 있다. 지난 2003년 5월에 입사를 했는데, 하고 싶은 일이라서 계속해서 (입사) 준비를 했고, 100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김 작가는 KBS의 인기 드라마 ‘용의 눈물’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진 드라마 타이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꿈은 KBS 아트비전에 입사하면서 현실이 된다. 탤런트 김명민을 스타덤에 올린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타이틀을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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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태 서예가가 쓴 드라마 ‘전설의 고향’ 타이틀. ⓒ 김성태

그가 입사를 하자마자 일필휘지로 제목들을 멋들어지게 쓴 것은 아니었다. 붓글씨만을 쓰던 그에게 그래픽 디자인은 새로운 세계였다. 포토샵은 그에게 낯선 세계였고, 배우고 헤쳐 나가야하는 대상이었다. 글씨를 쓰는 것과 프로그램 타이틀을 쓰는 것은 같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그가 입사 전에 연습했던 것은 주로 영화 제목이었는데 막상 입사를 하니 그에게 떨어진 일은 ‘한미 FTA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정권 이대로 좋은가’ 하는 시사 프로그램 제목이었다.

타이틀을 하나 써달라고 주문을 받으면 200장에서 300장을 썼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것이 나오지 않으면 밤을 새면서 글씨를 썼다. 버티지 못하면, 배겨내지 못하면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니 더욱 더 절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3년을 버티자 달라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는 것이 김 작가의 술회다. 서예가가 그래픽디자인에 눈을 뜨면서 작품세계가 변화하는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일과 작품활동의 접목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 작가는 대한민국 미술전에서 특선을 하고, 초대작가가 되었다. 2007년과 2008년에 연이어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일을 하면서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한 결과였다.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면서 김 작가는 환하게 웃었다.

–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 타이틀은 무엇인가? “‘드라마는 <TV 소설 찔레꽃>을 처음 썼다.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지금 봐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영상앨범 산> 역시 호평을 많이 받아 기억에 남는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여름의 드라마 <전설의 고향>은 김 작가가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드라마의 제목이다. 그 드라마가 새롭게 방영되면서 타이틀을 다시 쓰게 됐는데 그걸 김 작가가 썼단다. 그 또한 감회가 새로운 타이틀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쓴 프로그램 타이틀은 수천 개에 이른다는 것이 김 작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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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방지기’ 김성태 서예가 ⓒ 유혜준

드라마는 제목을 쓰기 전에 시놉시스를 보고 드라마 내용을 파악하는 등의 사전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용에 걸맞는 ‘특별한’ 제목을 써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씨는 결국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작업이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던가. 김 작가는 기왕이면 자신이 타이틀을 쓴 드라마가 대박이 났으면 좋겠단다.

–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해서 글씨를 써왔다. 자신의 수준을 스스로 평가한다면? “글씨는 끝이 없는 것 같다. 사람과 글씨는 늙어야만 갖춰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서예가는 어린 신동이 없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노력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묵어서 나오는 곰삭은 맛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도 붓을 잡으면 글씨가 늘 힘들고 두렵다는 것을 느낀다. 내 글씨의 수준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안다. 그래도 외부에 내 글씨가 제일 훌륭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글씨를 잘 쓰는 작가로 남고 싶다.”

– 앞으로 계획은? “요즘은 캘리그라피가 유행이다. 캘리그라피는 손으로 쓴 아름다운 글씨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10여 년 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류바람이 불면서 더더욱 한국적인 맛을 찾는데 캘리그라피가 유행하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 중에 캘리그라피 입문서를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덧붙이는 글 |
전시 제목 : 다산선생탄신 250주년과 정본 여유당전서 발간 기념 장천 김성태 초청전 <아! 여유당>
전시 장소 : 인사동 아라아트(T.02-733-1981)
전시 기간 : 2013년 9월 4일~10일
전시 주관 : 다산학술문화재단
전시 후원 : 문화체육관광부

– 오마이뉴스 / 유혜준(hjyu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