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그리고 새기고 찍은” 수묵 목판화 30년… 80년대 민중미술부터 최신작까지 250여점 전시
내일부터 대규모 개인전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서
“복제 판화 판치는 왜곡된 미술판 확 뒤집고 싶다”
목판화 작업을 30년 천착해온 목판화가김준권(58)이 ‘나무에 새긴 30년’ 이란 이름의 대규모 개인전을 10일 연다.
작가의 목판화 예술을 돌아보는 전시에는 1980년대 민중미술부터 최신작까지 250여점이 출품된다. ‘팔만대장경’ 처럼먹으로찍어내는 먹판화 전통을 치열한 연구로 살려내고, 현대적 계승을 이뤘다는평가를 받는 그만의 독보적인 ‘수묵 목판화’가 대거 선보인다.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전반을 조망하고, 치열한 목판화 작업정신과 연구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나아가 이번 전시는 판화를 둘러싼 한국 미술시장의 왜곡된 상황과 인식을 들춰내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도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현재 미술계에는 판화작가들이 설 자리가 거의 없다. 대중적 인지도가있는 작품들이 대량 찍혀 아트상품으로 판매되면서 판화는 그저 복제 판화란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판화전도 잘 마련되지않고, 평론가들의 진지한 비평도 없다.
전시에 앞서 만난 김 작가도 “제대로 된 창작 판화 작품전을 통해 복제 판화가 판을 치며 판화 세계를 대변하는 지금의 이 왜곡된 미술판을 확 뒤집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죽하면 판화가들이 그냥 판화가 아니라 창작 판화라는 용어를 쓰겠는가” 라며 “대중의 인식 개선에 나서야 할 일부 대형 갤러리들이 오히려 복제 판화 판매에 열을 올리며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구한 역사의 우리 먹판화, 즉 수묵판화는 유성판화와 차별화되면서 해외 전문가들의 호평이 이어지는 데 정작 국내에선 관심이 적다”고 아쉬워했다. 기획자인 윤범모평론가(가천대교수)는 “김작가는 순교자처럼 목판작업을 붙들고있는 드물고 큰 작가”라며 “목판화의깊은역사와 미술사적 의미, 작품으로서의 맛 등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안타깝다”고 밝혔다.
미술계에선 김 작가의 이번 작품전이 수묵목판을 중심으로 한 진정한 창작판화의 가치를 되새기고 그 맛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가 크다. 전시회엔 고무판, 흑백 유성목판, 손채색 목판, 다판 다색 유성목판,수묵 목판, 채묵(彩墨 ) 목판 등 목판 중심의 다양한 판화기법 작품이 모두 나와 그의 30년 판화 연구를 알 수 있다. 특히 수묵 목판은 피나무, 은행나무, 배나무 등에 그림을새기고 먹이나 한국화 물감을 칠한뒤 판화지가 아닌 화선지를 적당히 적셔 판에 올려 문질러 찍어낸다. 중국 유학, 일본 연수 등을 통해 작가가 잊혀진 명맥을 되살려낸 고유 판화기법이다.
수묵 목판화는 수묵화처럼 먹의 진함과 연함, 번짐 등이 화면에 나타나지만 수묵화와도, 유성판화와도 다른깊은맛을 낸다. 유성판화는판화지 위에 색이 얹혀지지만 수묵판화는 화선지에 스며들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이 강조되는 다른 목판과 달리 그의 작품은 면, 색이 도드라진다.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얼핏 보면 ‘참 잘 그렸다’ 정도로 생각하지만 볼수록 나무와 나무, 산과 산의 중첩된 사이에서 나오는 울림이 있다”며 “그 울림은사람간의 속삭임일수도, 민중들의 아우성일 수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장엄한 울림일수도 있다”고 평한다. 윤범모 교수는 “근래의 산수풍경 등의 연작은 판화기법의 원숙미를 드러내면서 운문 정신과 율동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수묵 목판화 작업은 엄청난 노동력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작품 ‘산에서 1303’ 은 목판 40개, ‘산운0901’ 은 48개를 그리고 새겨 찍고 또 찍어 완성했을 정도다. 작가는 “산과 들, 바다, 나무, 꽃들 모두 사생과 사색의 기록들이자 가슴으로 되새김질해 그리고 새기고 찍은 풍경들”이라며 “깊은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저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초 유화를 공부(홍익대 서양화)한 김 작가는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 을 펼쳤으며 교사로서 미술교육운동 전교조 활동을 하다 1989년 해직된 이후 충북진천으로 내려가 전업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 29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
(02)733-1981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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