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사회에서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치예요. 나부터 먹고살기 바쁜데 가난하고 헐벗은 남을 위한 누가 발 벗고 나서겠어요.
용산 남일당,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등에서 철거민, 해직노동자들이 울음을 터뜨렸을 때 대중들은 무관심했지요.
예기치 않은 참사가 발생하고서야 사람들은 관심을 가졌고, 정치권도 그제야 눈길을 줬지요.
비약해서 말하자면 한국사회는 사람이 죽어나가야만 비로소 관심을 주는 곳이 된 것 같아요.
‘오늘, 해는 다시 떠오른다’ 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황재형씨의 ‘연탄’을 보세요. 연탄에 뚫린 22개의 구멍을 통해 은근하면서 끈기 있는 불길이 솟고 있어요. 가만히 보고 있자니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가 생각난답니다.
이원석씨의 ‘고단한 하루’를 보면 부부관계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소시민의 피곤한 하루가 그대로 느껴져요.
임승천씨의 ‘Dreamship3’에서는 노아의 방주 같은 배 위에 판자촌이 들끓고 있어요.
박장근씨의 ‘인생길’에서는 세월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소시민의 삶이 엿보여요.
이윤엽씨의 ’85호 크레인’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네요.
작가들은 사물과 현상을 함부로 비틀지 않아요. 뜬 구름 잡는 예술타령이 아니에요.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들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이게 리얼리즘이겠죠.
서울 종로구 견지동 아라아트 센터에서 29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회는 한때 리얼리즘 예술의 전초기지였던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이 주최한 행사인데요, 전시회의 표면적 이유가 ‘기금마련’에 있어요. 돈을 모으기 위해서란 거죠. 목적이 뻔해 보인다고요? 하긴 그렇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이 전시회는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기금횡령 등 부끄러운 부채를 남긴, 이른바 ‘사고단체’로 전락하고만 민예총이 무슨 낯짝으로 손을 내미느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16일 시작된 전시회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비교적 뜸하군요.
하지만 전시회가 마련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남다른 느낌이 올 수 있습니다.
작품들은 여느 전시회처럼 택배로 ‘배달’된 것이 아니에요. 새롭게 구성된 민예총 사무국 직원들이 전국 방방곡곡에 흩어진 작가들의 작업실을 일일이 찾아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두 손 모아 받은 것이지요.
민예총에 몸을 담았다가 일부 인사들의 행태에 넌더리를 내고 뒤로 물러앉은 이들과, 아예 탈퇴까지 한 이들을 모두를 찾아갔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민예총의 재도약 종잣돈 마련을 위해 사실상 작품을 거저 달라니…. 이게 어디 씨알이나 먹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먹혔습니다.
저간의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 전시회는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100여명의 신구 작가들의 작품들로 풍성히 채워졌습니다.
1960~1970년대 엄혹한 시절, 캔버스 하나로 세상을 바꾸길 원하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화백부터 장난기 가득한 30대 신세대 작가들까지 생때같은 작품을 너나할 것 없이 내놓았지요.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위로하던 민예총이 묵은 빚을 갚고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는 명분이 반성과 함께 작가들에게 내민 유일한 약속어음이었답니다.
악성 채무자의 진정한 반성은 진 빚을 갚겠다는 의지를 맨몸뚱이로 드러낼 때 비로소 시작한다고 봐요. 민주당이 대선패배의 원인을 용케 못 찾는 요즘, 저는 반성이 담보된 이 전시회의 약속어음을 기꺼이 받아들고 싶습니다.
– 뉴시스 / 손대선 기자 / sds1105@newsis.com